
“엄마, 심심해. 뭐 재미있는 거 없어?”
이 말은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려왔습니다. 처음엔 이 한마디가 왜 그렇게 부담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지루해하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급해졌고, 혹시 제가 부족한 엄마처럼 보일까 괜히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이 눈빛이 조금만 흐려져도 서둘러 무언가를 내밀곤 했습니다. 새 장난감을 사주고, 학습 앱을 켜주고, 그것도 안 되면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을 틀어주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이의 지루함을 해결해 준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여백을 대신 채워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때부터 제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심심함은 메워야 할 구멍이 아니라, 아이 상상력이 자라는 흙이었습니다.
1. 심심함은 멈춤이 아니라 ‘생각이 켜지는 시간’이었어요.
예전의 저는 아이가 멍하니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육아 공부를 조금 찾아보니, 사람이 조용하고 자극이 적을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쉽게 말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상상력이 가장 활발해진다는 겁니다.
이걸 알고 나니 아이를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아이도 처음엔 “놀 거 없어!”라며 제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꾹 참고 개입하지 않자, 아이는 거실 구석으로 가더니 보풀 난 분홍 쿠션, 파란 소파 쿠션, 낡은 담요를 몽땅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쿠션으로 벽을 쌓고 담요를 덮어 자기만의 ‘비밀 요새’를 만들더군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심심함이 이렇게 일을 하는구나.”
정해진 규칙의 게임이나 화려한 영상은 아이를 보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순간은 아이를 만드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2. 부모의 기다림이 아이를 주도적으로 만들었어요
아이를 사랑할수록 다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겐 육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집안일이 밀린 날에는 “딱 30분만 조용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을 쥐여주고 싶은 유혹이 올라왔습니다.
어느 날도 너무 지쳐서 아이가 “심심해”라고 하자, 반사적으로 뭔가를 찾으려다 멈췄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지금 바쁘니까, 네가 재미있는 걸 찾아볼래?”
아이는 잠시 투덜대더니 구석에 있던 편의점 종이컵 뭉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처음엔 그냥 쌓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더니, 한참 뒤 그 종이컵들은 아이만의 ‘화성 기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부모의 적절한 침묵이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요.
아이가 “심심해”라고 할 때 곧바로 해결책을 주지 않고 잠시 기다려 주면, 아이는 스스로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합니다. 그 과정이 아이를 주도적인 존재로 키웁니다.
3. 평범한 물건이 최고의 장난감이 되었어요
심심함 속에서 아이는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봅니다.
값비싼 장난감은 정해진 방식대로만 쓰이지만, 심심함이 더해지면 평범한 물건이 마법처럼 변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 빈 택배 상자가 우주선이 되고,
-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숟가락이 무대 마이크가 되었고,
- 편의점 종이컵은 거대한 성이 되었습니다.
특히 잊지 못할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가 종이컵 탑을 쌓다가 몇 번이나 무너뜨렸습니다. 그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쌓았습니다.
마침내 자기 키만큼 높은 탑을 완성했을 때 아이의 눈빛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건 어떤 비싼 교구도 줄 수 없는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이었습니다.
그 짧은 심심함 속에서 아이는 집중력, 끈기, 회복탄력성을 배웠습니다.
💡 제 나름의 ‘심심함 육아 기준’ 정리
정리해 보니, 제 방식은 대략 이랬습니다.
- 아이가 “심심해”라고 할 때 → 바로 TV를 켜지 않고 “네가 어떤 놀이를 만들지 궁금해”라고 말해주기
- 혼자 놀 때 →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
- 짜증 낼 때 → “내가 도와준다고 했지?” 대신 “조금 답답했겠다, 다시 해볼까?”라고 묻기
- 놀이가 끝난 뒤 → 결과가 아니라 과정 칭찬하기
결론: 비워두어야 채워집니다
심심함은 게으름도, 방치도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랄 수 있는 소중한 여백입니다.
물론 아이가 정서적으로 힘들 때는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을 부모가 설계하기보다, 때로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저는 아이의 “심심해”라는 말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잠시 기다립니다. 그 침묵 끝에 아이만의 세계가 태어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심심함은 아이의 창의력을 키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봅니다.
“심심해? 좋아. 지금 네 생각이 자라는 시간이야.”